본문 바로가기
역사 관련 정보

갑인예송과 서인의 정권 장악 과정

by seon0324 2025. 3. 5.
반응형

갑인예송(甲寅禮訟, 1674년)은 조선 현종(顯宗) 때 벌어진 예송 논쟁 중 두 번째 사건으로,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대립이 극에 달한 사건이었습니다. 예송(禮訟)이란 왕실에서 상복을 입는 기간을 두고 벌어진 논쟁을 의미하며, 이는 단순한 예법 논쟁을 넘어 정치 세력 간의 정권 다툼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갑인예송에서 서인이 승리하며 남인은 정치적 실권을 상실하였고, 이후 조선의 정국은 서인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갑인예송이 발생한 배경과 전개 과정, 그리고 이를 통해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 대해 분석해 보겠습니다.

갑인예송과 서인의 정권 장악 과정
갑인예송과 서인의 정권 장악 과정

갑인예송의 배경

예송 논쟁은 현종 즉위 후 왕실의 상복을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갑인예송은 1674년 효종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두 번째 예송 논쟁이었습니다.

현종 시대 예송 논쟁의 배경

  • 효종(孝宗)이 1659년 사망하면서, 그의 어머니 자의대비가 입어야 할 상복 기간을 둘러싼 논쟁이 발생(기해예송, 1659년).
  • 기해예송에서는 남인이 우세하여 3년복이 결정되었으나, 서인이 반발하며 논쟁이 지속됨.
  •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하면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다시 쟁점이 됨.

서인과 남인의 입장

  • 남인: 효종은 왕이므로 그의 부인이 사망했을 때 자의대비는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
  • 서인: 효종은 신하의 신분에서 즉위한 왕이므로, 자의대비가 9개월 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

이 논쟁은 단순한 예법 문제가 아니라,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대결로 확대되었습니다.

갑인예송의 전개 과정

1674년 효종비 인선왕후가 사망하면서, 조정에서는 다시 예송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번에는 서인이 승리하였고, 남인은 대거 축출되었습니다.

예송 논쟁의 진행

  • 현종이 남인의 입장을 지지하며 자의대비가 1년복을 입도록 결정.
  • 이에 따라 서인은 정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함.
  • 하지만 1674년 말, 현종이 사망하고 숙종(肅宗)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반전됨.

서인의 반격과 남인의 축출

  • 숙종 즉위 후 서인이 왕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며 정국을 주도.
  • 서인은 갑인예송의 결정을 뒤집고, 남인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림.
  • 결국 숙종은 서인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남인은 대거 축출됨.

갑인예송 이후 서인의 정권 장악 과정

서인의 정국 운영

  • 서인이 정국을 장악한 후, 남인을 지속적으로 견제하며 정치적 입지를 강화.
  • 남인의 주요 인사들이 숙청되거나 유배됨.
  • 서인은 이후 환국(換局) 과정을 거치며 조선 정치의 핵심 세력으로 자리 잡음.

서인의 분열과 노론·소론의 등장

  • 서인이 정권을 잡은 이후 내부적으로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
  • 노론은 강경한 정치 노선을, 소론은 온건한 정책을 주장하며 대립.

숙종 시대의 정국 변동

  • 숙종은 환국을 반복하며 정국을 조정, 서인과 남인을 번갈아 등용.
  • 결국 서인이 정치적으로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며 장기적인 정권을 유지.

갑인예송과 서인의 정권 장악 비교 요약

구분 갑인예송 서인의 정권 장악
시기 1674년 숙종 즉위 후
주요 세력 서인 vs 남인 서인(노론·소론 분열)
정치적 결과 서인 승리, 남인 몰락 서인이 장기 집권

결론

갑인예송은 조선 후기 당쟁의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 정치에서는 서인이 주도권을 잡으며 남인은 정치적으로 쇠퇴하였고, 서인 내부에서도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조선 후기 정국은 서인 중심으로 운영되며, 환국과 붕당 정치가 지속되었습니다.

반응형